[박선옥칼럼] 대통령과 개그우먼 간 전쟁의 상징성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칼럼

박선옥 논설실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7-21 00:02:40

현재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상징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코미디언 로지 오도넬이다. 이 둘의 20년에 걸친 공개적 신경전은 개인적 감정의 문제를 넘어서, 현대 미국 사회의 구조적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오도넬을 향해 “인류에 대한 위협”이라며 시민권 박탈을 언급한 것은 가볍게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이는 미국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발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오도넬의 갈등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스 USA 대회를 운영하던 트럼프의 처리 방식을 오도넬이 TV 프로그램에서 조롱한 것이 발단이었다. 트럼프는 이를 단순한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도넬을 ‘좌파 미디어 엘리트’의 대표 주자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2016년 공화당 대선 토론에서는 메건 켈리가 트럼프의 여성 비하 발언을 지적하자 트럼프는 주저 없이 “오직 로지 오도넬에게 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 순간 청중은 폭발적으로 환호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트럼프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에 질린 미국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 트럼프의 오도넬 공격은 정치적 전략으로 봐야 한다. 공개적인 레즈비언이자 진보적 가치를 대변하는 연예인으로서 오도넬이라는 인물이 미국 사회에서 상징하는 바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도넬은 소수자 권익과 다양성을 옹호하는 PC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미국’의 상징이었다. 반면 트럼프는 기존 질서와 전통적 가치를 지키려는 ‘오래된 미국’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이 대립 구도에선 미국 사회의 깊은 균열이 보인다. 한쪽에는 할리우드·주류 언론·대학가로 대표되는 진보 엘리트가 있고, 다른 쪽에는 그들의 도덕적 우월감과 강요된 PC주의에 반감을 품은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 트럼프는 바로 이 침묵하는 다수의 분노를 대변하는 인물로 부상한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의 갈등은 미국 사회의 숨겨진 계급 갈등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보수 vs. 진보’의 이념 대립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소외 계층과 문화적 엘리트 간의 갈등이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반면, 오도넬로 대표되는 진보 엘리트들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날로 오만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갈등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 사회 역시 동일한 구조적 모순에 빠져 있다. 약자를 위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진보 엘리트들의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뻔뻔한 내로남불의 위선적 행태에 많은 국민이 환멸을 느낀 지 오래다.

문제는 이런 현상에 염증을 느끼는 국민이 다수 존재하지만, 그들의 분노와 좌절을 대변할 정치적 인물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하며 정치적 돌풍을 일으켰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런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존 보수 정치인들은 진보 엘리트들의 위선을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도덕적 프레임에 말려들어 쩔쩔맨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 엘리트들의 도덕적 헤게모니는 절대적이다. 그들이 정의한 ‘올바른’ 가치관에 동조하지 않으면 곧바로 ‘극우’ ‘꼴통’으로 낙인찍힌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국민은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표현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목소리는 억압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억압된 목소리들이 언제까지나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트럼프 현상이 미국에서 일어났듯이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진보 엘리트들의 위선과 도덕적 우월감에 맞서는 정치적 흐름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현재의 정치 지형도는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과 개그우먼의 전쟁. 이 기이한 대립은 이 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분열된 사회의 민낯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도덕적 우월성을 선점한 진보 엘리트들의 독점적 구조의 허상이 드러나고, 국민의 진정한 목소리가 수면 위로 부상하는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박선옥 논설실장 sobahk@skyedaily.com 기자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스카이데일리는 온라인 판 스카이데일리닷컴과 32면 대판으로
매일 발행되는 일간종합신문 스카이데일리(조간)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후원자 분들께는 지면광고를 하고자 하실 경우
특별 할인가격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