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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의 구술기억-②] 한센인 ‘가족’… 공동생활이 만든 연대
정착촌서 만나 새 인연으로
강제조동·통제의 소록도 생활
반려견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
이세희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6-02-24 06:00:03
한센인은 나균 감염으로 발병하는 한센병을 앓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한센병은 조기 진단과 다제약물치료로 완치가 가능하지만, 과거 많은 환자들은 사회적 배제와 강제 격리를 겪어야 했다. 
 
스카이데일리는 한센인의 삶을 조명하고 그 시간을 사회적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앞으로 2차례에 걸쳐 한국한센총연합회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한센인의 구술기억’ 1·2권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이번 2권 편에서는 여성 구술자 허귀순·이향선·김연·김장미(가명) 씨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센인의 일상과 가족의 시간이 어떻게 기록됐는지 들여다본다. 
 
▲ 1941년생 여성 이향선(가명) 씨는 “옛날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여러 선생님들이 도와주셔서 이만큼 잘 산다”면서 “건강관리 잘 해서 허귀순 씨와 함께 오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챗GPT 생성 이미지
 
전쟁·가난 속 발병… 갇히고 버려졌다
 
이향선(가명)씨는 1941년생 여성이다. 12살 무렵 방공호를 파고 대피하던 전쟁 시절, 얼굴이 갑자기 붓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을 발병의 시작으로 떠올린다.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 늘 눈을 뜬 상태가 됐다. 그는 교회 신부가 입원을 미루며 자신을 가두고 굶겼던 시간을 “먹을 것도 부족해 약을 먹어도 빈속에 토하기만 했다”고 회상했다.
 
이씨와 함께 사는 허귀순(가명) 씨는 1938년생 여성이다. 아버지가 먼저 한센병을 앓았고, 자신도 12살에 병이 생겼다. 동네 사람은 “병 옮긴다”는 이유로 전쟁통에 그를 솔밭에 버렸고, 그는 물도 없이 며칠을 굶었다. 이후 한 남성이 그를 데려가 경북의 병원으로 보냈지만, 집에서는 찾으러 오지 않았다. 허씨는 그때의 서운함보다 “병에 걸렸으니 그럴 수 있다”는 체념이 먼저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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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촌의 공동생활… 일·결혼·이동을 거쳐 ‘둘의 현재’로
 
이향선 씨는 17살 무렵 정착마을에 오면서 삶이 달라졌다. 먹을 것이 많았고, 사람들이 병을 꺼리지 않으며 자신을 가두지도 않아 “천국 같았다”고 말했다. 정착마을에서는 한 방에 5~6명이 함께 살며 밥도 같이 먹고 생활도 함께했다.
 
밀가루를 받으면 한꺼번에 부침개를 해 나눠 먹고, 며칠 배부른 뒤 며칠 굶는 식의 생활도 반복됐다. 다른 이들은 곡식을 조금씩 남겨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그는 결혼은 하지 않았고, 운전을 좋아해 자가용으로 여행을 다녔다. 환우들 중에는 치료제 DDS를 “많이 먹으면 빨리 낫는다”는 믿음으로 정량보다 더 먹는 경우도 있었고, 속이 시리고 아파도 그렇게 버틴 이들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허귀순 씨는 병원 이후 정착촌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살다가, 원치 않았지만 주변 중매로 결혼했다. 남편도 한센인이었고 자신보다 세 살 많았으며, 결혼식 없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정착촌 시절 어머니가 찾아왔을 때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기억도 있다. 
 
큰오빠는 6·25 때 사망했고, 보상금이 나와 어머니가 그 돈을 건네 소를 샀다. 소를 키워 판 돈으로 논과 밭을 사며 남편·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어서 살았다. 이후 남편은 더 살기 좋은 마을로 옮기자고 권했고, 지금의 곳으로 와 집을 샀다. 남편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남편보다 먼저 사망했다.
 
두 사람은 정착촌에서 알게 된 지 40~50년이 됐다고 말한다. 정착촌에서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소록도에 가 수양하겠다”며 두 사람을 데리고 갔고, 떠밀리듯 한 달가량 머물다 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향선 씨는 “옛날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여러 선생님들이 도와주셔서 이만큼 잘 산다”고 말했다. 이어 “많이 먹어서 살이 쪘는데 식단 조절하고 건강관리 잘 해서 허귀순 씨와 함께 오래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 1930년생 여성 김연(가명) 씨는 안동의 광산 김씨 집안에서 자란 양반가 막내딸이었다. 사진=챗GPT 생성 이미지
 
양반가 막내딸, 안동에서 소록도까지
 
안동의 광산 김씨 집안에서 자란 김연(가명) 씨는 1930년생 여성이다.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서당 훈장을 했다. 집은 벼·보리 농사를 지었고 일꾼도 있었다. 한옥 대청마루가 있었고 소·닭·돼지를 키웠다. 어릴 때부터 양반가 예절 교육을 받았다. 할머니는 인사법과 손님 예절을 엄하게 가르쳤고, 안동식혜와 삼베·모시·무명 짜는 법도 익히게 했다. 어머니에게서는 바느질과 음식하는 법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당시라 집에서는 길쌈을 해 일본에 바쳐야 했다. 삶의 방향이 바뀐 건 열세 살 무렵이다. 얼굴과 손이 붓기 시작했고, 일본 순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김씨는 여수까지 가서 배를 타고 소록도로 들어갔다. 대구에도 시설이 있었지만 그는 소록도를 택했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아버지가 계속 찾아올까 봐서다. 김씨는 “아버지가 나를 너무 아꼈다”고 기억했다. 그 애정이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까 두려워 멀리 떠났다는 고백도 덧붙였다.
 
강제노동과 통제 속의 소록도 생활
 
섬의 생활은 고됐다. 들어갈 때는 붓기만 있었고 염증이나 고름은 없었다. 곧 굶주림과 노동이 이어졌다. 그는 일본인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고 회고했다. 열세 살에 벽돌을 여러 장 이고 배에 실어준 기억이 남아 있다. 파래와 김을 뜯어먹고 쌀 껍데기로 죽을 쑤어 먹었다. 해방도 소록도에서 맞았다.
 
그는 여자들만 있는 방에서 지냈다. 막내였던 그는 할머니들의 요강을 비우고, 붕대를 삶거나 씻어 다시 감는 일을 맡았다. 단체방에서는 밥하고 씻기고 빨래하는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낮에는 벽돌을 나르고 밤에는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만들었다. 교회에 가려 해도 일을 시키려 몽둥이를 든 일본인들이 막아섰다는 기억도 있다. 또래들과는 서로 돕고 음식도 나눠 먹었다.
 
김씨는 결혼하지 않았다. 소록도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섬을 나온 뒤 다시 만난 날, 둘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는 서른아홉 살 무렵 소록도를 떠났고, 검사에서 “이제 음성으로 균은 없고 흉터만 남았다”는 말을 들었다.
 
현재 김씨는 한센인 생활시설에서 지낸다. 입소 2년째다. 밤 8시에 자고 새벽 5시에 깬다. 스무 살 무렵 소록도에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지금도 수요일과 주일 예배를 이어간다. 예절과 길쌈을 배우던 안동의 마루에서, 벽돌을 이고 붕대를 삶던 섬의 방을 지나, 그는 오늘의 일상을 산다. 
 
 
▲ 1951년생 여성 김장미(가명) 씨는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반려견 순딩이(가명)와 함께 살고 있다. 사진=챗GPT 생성 이미지
 
소록도에서 보낸 5년과 가족의 기억
 
김장미(가명) 씨는 1951년생 여성으로 6·25 전쟁 중 태어났다. 집에서는 벼농사를 지었고 형편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홉 살 무렵 얼굴에 결절 같은 증상이 나타났고, 아버지는 그를 소록도로 데리고 갔다. 김씨는 “어려서 무서운 줄도 몰랐다”고 했다.
 
소록도에서는 열두 살에 녹동국민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가까이 오지 않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친구들이 멀리했다”고 김씨는 말했다. 소록도 생활은 5년가량 이어졌고, 그동안 아버지는 몇 차례 찾아왔다.
 
김씨는 중학교에 가지 않았다. 소록도에서의 시간은 “힘들지도,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았다”고 기억했다. 열일곱 살에 소록도를 나와 결혼했다. 단체 소개로 만난 남편과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남편과는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넘었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아 키웠다.
 
아이들은 버스가 없어 학교까지 왕복 8km를 걸어 다녔다. 두 딸은 중학교를 마친 뒤 공장으로 갔다. 아들은 중학교 졸업 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산업체 고등학교를 다녔다.
 
정착마을의 오늘… 새벽 4시에 시작되는 하루 
 
현재 김씨는 한센인 정착마을에 산다.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누에를 치고 소도 키웠지만, 지금은 밭에 파와 가지를 심는 소일거리로 하루를 보낸다. 밤 10시에 잠들고 새벽 4시에 눈이 떠진다. 
 
치료의 기억도 남아 있다. 김씨는 “정착마을에 와서도 무료로 배급된 DDS를 먹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혈압약을 타러 병원에 다닌다. 예전에는 거리가 멀어 한 번 가면 두 달 치를 받아왔지만,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 간다.
 
50년을 함께 산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는 2년이 됐다. 말수가 적고 순한 사람이었다. 이제 김씨 곁에는 1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반려견 ‘순딩이’가 있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크게 반겨주는 존재다.
 
김씨는 딸과 매년 김장을 한다. 지난해에도 50포기를 담갔다. 사서 먹자고 해도 딸은 “엄마가 담는 게 맛있다”고 한다. 아들이 읍내로 나오라고 권했지만, 김씨는 남편이 지어준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읍내도 자유롭게 오간다.
 
신앙도 오래 이어졌다. 교회는 열두 살 때부터 다녔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집에서 성경책을 본다. 정착마을은 산등성이 외진 곳에 있고 버스가 다니지 않아 택시로 오간다. 예전에는 길조차 없어 십리 길을 걸어야 했고, 누에를 먹여 지게에 이고 읍내까지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차 없이 살아왔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지긴 했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장미 씨의 시간은 사건보다는 생활의 결로 남아 있었다. 처음 배를 탔던 기억, 교실에서 느꼈던 거리감, 아이들의 8km 통학길, 새벽 4시에 시작되는 오늘, 남편과 반려견이 남긴 온기까지. 김씨는 “그래도 살아진다”는 말로 하루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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