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18º
습도 50%
)
5.3 인천 사태엔 학생은 물론 재야 시민단체, 노동운동 단체가 모두 모였다. 광주 5·18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라고 할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다. 승연의 아버지 오정일은 대규모 집회가 회사 부근에서 벌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요일이었지만 시위가 과격해지면 시위에 참여했던 근로자들이 회사로 와서 불법 행위를 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오정일은 시위 중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회가 열리는 시민회관 쪽으로 걸어갔다.
거리에 나뒹구는 전단지의 내용은 살벌했다. 민족통일 방해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전두환 정권 말살하자 등의 구호가 빨간 글씨로 쓰여 있었다. 주안역 앞 시민회관 사거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시민회관 건너에 있는 민정당 제1 지구 당사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고 이어 각 단체의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최루탄이 발사돼서 그곳에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오정일이 회사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리는데 성당 방향에서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죄하라’ ‘저임금, 실업 강요하는 재벌 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는 인사련(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무리와 맞닥뜨렸다. 저임금, 실업 강요하는 재벌 정권 타도하자는 현수막을 보는 순간 그들이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아, 난 재벌이 아닌데도 맞아 죽겠구나. 오정일은 눈을 감았다. 최루가스에 코와 목이 메스꺼웠다. 5.3 사태엔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급진적인 단체 CA그룹(제헌의회 그룹)이 혁명으로 제헌의회 수립하자는 현수막을 본 후 북한 간첩이 잠입했거나 그들이 개입했다는 확신을 했다.
노동 현장에도 불온 세력이 침투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가뜩이나 화장실에서 발견한 삐라 때문에 찜찜했는데 며칠 전 물품 하역장에서 또 황당한 북괴 삐라 십여 장을 발견했다. 경찰에 신고했다.
삐라 내용은 이랬다. 인민기를 든 농민, 의사, 노동자 사진 아래 민중 위주의 나라, 민족의 태양, 1948년 9월9일 김일성 장군님께서 창건하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 위주의 주체사상을 지침으로 삼는 민중 위주 사회이다. 민중을 위한 시책이 펴지는 이북은 빈부 격차·실업자·거지·세금·학비·치료비·공해가 없는, 민중이 살기 좋은 세상이다….
10살 때 전쟁을 겪고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오정일이었다. 전범자를 민족의 태양이라니, 오정일은 노조 설립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는데 삐라를 발견하고 5.3 집회를 본 후 생각이 달라졌다.
5.3 이후 노조 설립은 공장마다 도미노처럼 일어났다. 이후 6.10 대규모 시위가 있고 나서 부평 산단 분위기는 예전보다 살벌했다. 오정일은 분명했다. 노조 설립은 허락하나 빨갱이 사상을 가진 사람은 해고하겠다, 선언했다. 경찰이 수사하고 있지만 자체적으로 삐라 뿌린 불순분자를 가려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노조원 중 위장 취업자는 물론, 이념 불온서적이 발견돼도 해고 대상이라는 각서를 받았다. 얼마 뒤 모든 취업 서류를 다시 검토하고 근로자들의 수상한 행태를 면밀하게 감시한 결과 두 명의 위장 취업자가 발견됐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1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