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고대 전쟁에서 최첨단 무기였다. 특히 말이 끄는 전차는 춘추전국시대 전술의 핵심이었다. 왕과 귀족은 전차를 타고 전투를 이끌었다. 이런 까닭에 전국시대 제(齊)나라에선 전차 경주가 유행했다. 유명한 장군 전기(田忌)는 왕족과의 마차 경주에서 늘 졌다. 3전2선승제로 벌어진 경주는 3패로 끝났다. 특히 제 위왕이 가진 마차는 나라 안에서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기에겐 전략가 손빈(孫臏)이 있었다. 말들을 유심히 살핀 손빈은 가장 약한 말을 가장 강한 상대 말과 맞붙였다. 경주는 여느 때처럼 패배로 시작됐다. 그러나 가장 강한 말을 앞세워 두 번째로 강했던 상대 말을 이겼다. 두 번째로 강했던 말도 가장 약한 상대 말을 이겼다. 한 번 지되 두 번 이기는 작전은 적중했다. 손빈에 얽힌 이야기는 전략적 선택과 자원 배치의 지혜를 보여준다.
사기 손자오기열전을 처음 읽었을 때 무릎을 쳤다. 손빈은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 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손빈은 인재를 모으던 위(魏)나라로 갔다. 잘나가던 손빈에게도 시기와 질투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동문수학했던 방연이 모함하자 손빈은 제와 내통한 첩자로 몰렸다. 무릎이 잘리자 손빈은 살기 위해서 미친 척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돼지 똥까지 먹었다. 감시가 느슨해지자 손빈은 사신이었던 순우곤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쳤다.
손빈에게 전쟁이란 칼과 방패가 아닌 머리와 전략으로 싸우는 무대였다. 위(魏)나라가 기원전 353년 조(趙)나라를 공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가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제는 전기에게 구원군을 맡겼다. 손빈은 전기에게 말했다.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치면 형세에 따라 저절로 풀릴 겁니다.” 방연이 이끄는 강군과 맞서 싸우지 말고 오히려 위를 공격하자는 작전이었다.
전기가 이끈 군대는 위의 수도 대량을 쳤다. 손빈을 미워했던 방연은 깜짝 놀랐다. 대량을 뺏기면 나라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의 수도 한단을 점령했던 방연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손빈과 방연은 계릉에서 만났다. 먼 길을 달려온 방연은 지쳤고 손빈의 매복작전은 승리로 이어졌다. 계릉전투가 유명해지자 위를 포위해서 조를 구한다는 고사성어 ‘위위구조(圍魏救趙)’가 생겼다.
손빈과 방연은 기원전 341년 마릉에서 또 만났다. 위가 한(韓)나라를 공격하자 제가 구원군을 보냈다. 전기와 손빈의 군대가 대량으로 움직이자 방연은 기다렸다는 듯 한을 공격하던 군대를 돌렸다. 게다가 미리 준비해 둔 군대가 대량에서 승리까지 거뒀다. 하지만 위기에서도 손빈은 침착했다. 손빈은 전기에게 “저들은 평소 사납고 용맹해서 우리를 겁쟁이라 부릅니다”면서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기세를 잘 살펴서 형세를 유리하게 이끕니다”고 말했다.
손빈은 날마다 아궁이 수를 줄였다. 방연은 적군이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손빈을 뒤쫓았다. 그러나 웬걸, 마릉에 도착하자마자 빗발치는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심리전으로 방연을 유인한 손빈은 유리한 곳에서 싸워서 병력 열세를 뒤집었다. 마릉 전투에서 승리한 손빈은 당대 최고 병법가로 소문났고, 강대국이었던 위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혹시 소설이 아닐까 싶었던 손빈 이야기는 중국 최고 역사책 사기에 실린 사실이었다.
최근 영화를 보다가 오랜만에 손빈이 떠올랐다. 소니 헤이스는 영화 F1 더 무비의 주인공이다. 브래드 피트는 주인공 헤이스 역을 맡아 모터스포츠 대회(F1)를 둘러싼 이야기를 보여준다.
헤이스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다. F1 우승을 간절히 바라지만 명예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욕망이 없는 건 아니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카드를 던진다. 시속 350㎞로 질주하는 굉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게 한다. F1 더 무비는 중년 남성을 위한 동화였다. 숨막히는 경주를 보노라면 아드레날린이 쏟아진다. 운전을 즐기지 않는 사람조차 핸들을 붙잡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다.
헤이스도 손빈처럼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 기술책임자에게 곡선 주로에서 잘 달릴 수 있게 차를 개조해 달라고 했다. 1등과 2등처럼 직선주로 성능 개선에 몰두해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배짱과 운전 실력으로 겨룰 수 있는 곡선 주로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속셈이었다. 헤이스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느껴지더니 영화 머니볼도 떠올랐다. 그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는 미국 프로야구에 통계학과 사회과학을 접목시킨 빌리 빈 역할을 맡았었다.
그동안 잊고 살았다. 도전하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전에서 손빈의 통찰과 전략을 배웠다면, 성찰과 도전에 관해 닮고 싶은 분도 많다. 의사 이국종은 돈과 명예를 버리고 사람 살리는 일에만 매달렸고, 한약사 김장하는 한평생을 남을 위해 살았다고 알려졌다. 불공정한 세상에서 남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께 새삼스럽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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