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11] 들러리 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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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26 06:25:00

김근화가 권지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권지호가 먼저 입을 뗐다. “오랜만이야.” 김근화는 대답 대신 희숙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야?” 희숙을 흘끗 쳐다보며 묻는 표정이 건조했다. 권지호 옆에서 프로그램 안내서를 들고 있는 동행인이 누군지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회사 여직원.” 권지호 역시 건조하게 대꾸했다. 김근화가 희숙을 흘겨보는 눈빛은 오만하고 도도했다.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두 손 가슴에 모으며 머리 숙여 인사하던 겸손한 태도는 가식이었다고 고백이라도 하듯 상반된 태도였다. 무대 위의 감동이 반감되는 순간이었다.

“회사 여직원하고 이런 데도 다녀?” 희숙에게 들릴 만큼 목소리를 높였다. 확실히 그녀를 비웃는 태도였다. 권지호는 팔짱 낀 채로 김근화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표가 두 장이라….”

김근화 눈빛은 여전히 희숙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불쾌할 만도 한데 희숙은 태연했다. ‘나랑 권지호랑 그렇고 그런 관계거든.’ 미묘한 감정싸움에서 진짜 승자는 살 섞는 관계라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희숙의 자신감은 이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후졌으면 권지호가 음악회에 같이 가자고 했겠어?’ 희숙은 김근화의 거만한 태도를 무시해도 될 만큼 여유만만했다.

김근화가 권지호를 바라보는 표정이 야릇했다. 개선장군의 의기양양함과 아쉬움, 반가움이 섞인 감정이 드러났다. 희숙이 딱히 뭐라 꼬집을 순 없지만 묘한 분위기가 그랬다.

권지호는 돌아서는 김근화에게 전화번호 줄래? 물었다. 김근화는 딱 2초 뜸을 들였다. 여자의 자존심에 냉큼 건네줄 수 없어서 1초, 권지호와 김근화의 사이를 희숙에게 보여야 해서 1초. 집 전화 그대로야, 번호 안 바뀌었어. 집 전화가 안 바뀌고 그대로란 말은 권지호가 전화번호를 갖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권지호는 대답 대신 검지손가락을 세워 그녀에게 오케이 사인을 던졌다. 음악회가 끝나고 권지호가 희숙을 데려간 곳은 바 형태의 카페였다. 아까, 권지호가 말을 꺼냈을 때 희숙은 먼저 대답했다.

“하마터면, 엉엉 소리 내 울 뻔했어요. 그냥, 슬펐어요.” 권지호는 그런 희숙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는 나랑 감수성이 비슷하구나. 나도 그 노래 좋아해. 솔직히 구노나 슈베르트 아베마리아를 들으면 졸립거든. 너무 단조롭고 밝잖아. 어떤 느낌이냐면 신에게 자궁을 빌려준 것이 전부인 순박한 변두리 여자 같은 느낌인데 바빌로프는 달라.”

바빌로프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희숙은 어딘지 노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권지호는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바빌로프의 아베마리아는 그런 뉘앙스가 아니야. 인간의 죄를 대속할 아이,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죽어 갈 아이에 대해 처절한 운명을 느끼는, 그런 마리아지. 그래서 노래 부르는 사람조차 특별히 뭐라고 말 못 하고 가사도 없이 그냥 아베마리아만 계속 불러대는 거야. 희숙은 더 이상 바빌로프의 아베마리아가 어떻게 다른지 묻지 않았다. 솔직한 것과 무식한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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