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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끝내 작별하지 못한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기억은 과거에 관한 현재의 산물이다. 과거는 미래나 현재보다 확실성이 강하다. 이러한 점들을 헤아릴 때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구성해 가는 복합체라 할 수 있다.
개별 쇼트들의 복합체인 영화도 과거 영상을 봉인하고 있다. 그 영상이 스크린에 투영되면 어떤 내러티브 같은 게 흐른다. 이야기대로 살아가(리라)는 인간은 이따금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응시하곤 한다. 그 어둠 속에서는 각자의 영화가 재생되고 있으리라.
한국에서는 2024년에 개봉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이하 ‘클로즈’로 약칭)를 보면 그런 어둠 속에서 재생되는 영화를 앓는 느낌이다. 빅토르 에리세가 발표한 최신작 ‘클로즈’는 끝내 작별하지 못한 기억을 향한 영화인의 추적을 울림이 깊게 묵시(默示·默視)한다. 이 영화가 이토록 잔잔하고 묵중하게 감정을 울리는 데 가담하는 요소들을 살펴보면 그 울림에 더 섬세히 감응할 수 있다.
‘클로즈’ 속의 미완성 영화 ‘작별의 눈빛’은 미장아빔, 즉 영화 속 영화로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 인생을 반영한다. 그가 ‘벌집의 정령’(1973)에도 ‘프랑켄슈타인’(1931)을 녹여내고 ‘남쪽’(1983)처럼 빼어난 미완성작을 남겼음을 기억한다면, 이 ‘영화 속 영화’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미완성은 완성을 위한 길을 여므로 ‘작별의 눈빛’의 영화감독 미겔 가라이가 실종된 배우 훌리오 아레나스를 추적하는 추리물 성격이 ‘클로즈’에 깔려 있음을 자연히 수긍할 만하다.
추리물인 ‘작별의 눈빛’에서 훌리오는 유대인 남성의 잃어버린 딸을 찾는 탐정을 연기하는데, 그런 그가 현실에서는 추적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픽션과 논픽션이 뒤틀리는 상호 조응은 가상과 실재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맞붙은 거울 관계임을 묵시한다. ‘작별의 눈빛’ 속 야누스 석상도 보르헤스의 소설 ‘죽음과 나침반’ 속 두 얼굴의 헤르메스상을 대체한 것이다.
영화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을 믿는 이 영화에서 영화 필름들이 보관된 방은 그 자체로 영화의 무덤을 상징한다. 찰리 채플린의 포스터가 보이고, 미겔은 훌리오가 있다고 추측되는 요양원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이 그려진 플립 북을 펼쳐보며, 훌리오를 만나기 전의 밤에는 하워드 호크스 감독의 ‘리오 브라보’(1959) 속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곳곳에 첨부된 영화들의 울림을 감촉할 수 있는 자는 행복할 것이다.
다행히도 미겔은 훌리오와 재회하지만 훌리오는 대부분의 기억이 ‘망각’된 상태이다. 이때 기억이 아예 ‘상실’되지는 않았음이 중요하다. 시각적 무의식이 담긴 영화에는 그의 과거가 각인돼 있는바, 이런 영화를 통해 훌리오의 기억이 돌아오는 기적은 일어날까? 훌리오는 미겔과 함께 극장에서 ‘작별의 눈빛’에 출연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묵시하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클로즈’에서 여러 번 눈을 질끈 감는 카메라처럼. 차단은 일종의 작별이다. 작별이 새 폐허와 만나게 하듯, 카메라 렌즈도 다시 열림으로써 내러티브의 다음 마디를 잇는다. 훌리오의 눈이 감기는 그 순간 비로소 상영되기 시작할 것이다. 기억과 영화와 인생이 공명하는 기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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