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학과 아내는 돈을 좀 벌어 청계천 뒷골목에 전화 부품 가게를 하나 냈다. 길가에 평상을 내놓고 고스톱으로 시간 때우면서도 아내 덕에 겨우 유지하고, 꼬박꼬박 승리통신 전 사장님 소리 들으며 배 내밀고 거들먹거리며 당대 최고의 승용차 그랜저를 몰고 다녔다.
“형편이 그리 부유하지도 않은데 왜 그랜저를 몰고 다녀, 과한 허세 아냐?”
라라가 결혼 전에 준호에게 물었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타고 다니기 때문에 작은 차를 타면 없어 보여서 영업에 방해가 되거든.”
라라는 전무학과는 공존할 수 없을 듯했지만, 전무학의 아내, 그러니까 시어머니 김말희 여사와는 나쁘지 않았다. 여자로서의 공감대랄까. 사는 모습에서 김말희 여사와 라라는 닮아 있었다. 라라와 김말희 여사를 보면 고부간이 아니라 친정엄마와 딸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었다.
라라의 시어머니 김말희 여사는 아들 선호사상을 가진 시골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그곳에서는 그녀를 끝순이라고 불렀다. 다행히 마을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학식 있는 집안 어른이 이름을 지어주어서 말희라는 고상한 이름을 호적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학교에 다닐 필요 없이 집안에서 조용히 살림 배우다 시집가는 것이 최고라는 가풍 때문에 소학교를 겨우 마친 여인이었다. 머리가 영민한 탓에 오빠들 틈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글을 깨우쳤다. 그러나 그녀의 재능은 남편 전무학을 만난 탓에 피어나 보지도 못하고 부엌과 노점상과 구멍가게를 전전해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주변의 인심을 잃지 않아 돈을 좀 벌었고 사모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 전무학이 노년에 말썽을 일으키자 끝내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태껏 등골이 휘도록 뒤치다꺼리하면서 살았고, 밖에서 여자랑 놀고 다녀도 사내가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내 다 참았대이. 하지만 농팅이치다가 이 나이에 사업 말아먹은 늙은이랑 내는 더 이상 몬 산다. 이혼을 하면 했지, 대신 빚은 못 갚아준다. 집을 내가 왜 팔아요. 절대 안 된대이.”
그렇게 다 늙어 평생 자기를 도와주던 마누라에게 버림받듯 모스크바로 도망쳐 온 전무학이었다. 친구들의 빚 독촉을 피해 온 거였다. 서울에서 폐업을 코앞에 둔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면서 빚 독촉받는 것보다는 이곳 모스크바가 폼나고 살 만했다.
어쨌든 전무학은 라라가 식당일을 맡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오자 자신의 입지가 애매해진 거였다. 이곳에서 식당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가 자기더러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할까 지레짐작한 전무학은, 자기가 여기에 남아있어야 함을 역설하기 위해 라라를 깎아내렸다. 베라와 다리야는 그것이 라라의 실체라고 키득거렸다.
한국인이지만 알료나는 고려인 틈에 있으면 고려인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서툰 러시아어만이 알료나가 서울에서 온 유좐임을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알료나는 라라와 준호의 문제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준호의 말만 일방적으로 듣고 있어서였다. 또 진실을 안다고 한들 믿으려고 할지도 의문이었다.
“남자가 Y대 나올 정도면 실력은 인정해 줘야지.”
마치 라라가 준호를 이해하고 도와주지 않아서 그가 아무것도 못 한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라라를 만만히 우습게 보는 이유였다. 예상된 파국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준호와 라라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주방 복도에서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식당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논문 준비하고 복학하란 말이야. 내가 다시 모스크바로 온 이유가 그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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