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명지약국 앞에서 광주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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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준 산업경제부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9-03 00:02:40

45년 전 기억이 온전할까 싶다.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어디선가 순식간에 나타난 트럭에서 군인들이 내렸다.

그들이 일렬종대로 4차선 대로를 막아 서더니 곧바로 해산하라는 짧은 경고 방송이 나왔다. 잠시 후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나는 혼비백산 집으로 도망쳐야 했다.

총을 든 군인이 격발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예전에 멀찍이서 들려오던 총소리를 듣고 느꼈던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공포감이 나를 덮쳤다.

당시 나는 대로변 명지약국 계단에 조심스레 걸터앉아 있었고, 초등학생이던 나를 포함해 무장한 시민은 단 한 명도 없던 군중을 향한 발포였다.

5월27일 계엄군에 도청이 진압되기 이전까지는 평화로웠던 일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군 트럭과 장갑차는 차 한 대 없이 썰렁한 대로를 지키고 있었고, 골목골목마다 군인들이 짝을 지어 경계를 서며 수시로 순찰했다.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삼엄한 분위기가 며칠간 이어진 이후 군인들이 ‘착한 군인들’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고 난 한참 후에야 골목길 공터로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수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기간 동안 무서운 군인과 착한 군인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소총의 탄창 장착 여부도 알게 됐고, 군인들의 억양만으로도 도망쳐야 할 상황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탄창 없는 소총을 든 착한 군인에게 다가가 총 한번 만져 보게 해 달라고 조르는 용기도 내어 보고, 잠깐이나마 그런 기회를 얻기도 했다. 다시 조우하게 된 친구들과의 대화에는 이유 없이 잡혀갔다가 풀려났다는 동네 형 이야기나, 군인들에게 못쓸 짓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간 방직공장 여공이 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들이 섞여 있었다.

수십 년 만에 고향 집터에 잠시 들러 같은 자리에서 50년 가까이 약국을 지켜 온 약사님께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다. 얼마 전부터는 눈이 어두워져 이젠 처방 조제도 하지 않고 일반의약품만 취급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흔적도 남지 않은 길 건너편에 있었던 목화약국 여약사님 안부도 여쭈어 보며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 들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 간첩으로 의심받던 인물이 계엄군 측에 인계된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2021년 작고하신 전옥주 님의 사건이다. 그녀가 계엄군에 인계된 것은 광주 출신이 아니고(보성경찰서 사택에서 태어남) 억양이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당시 신군부는 광주 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불순분자가 일으켰다는 흑색선전을 했고, 시민군은 간첩 의심을 받던 전옥주 님의 신병을 계엄군에 인계했다. 그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무죄를 선고받아 누명을 벗었다.

항쟁을 이끌던 시민군과 학생 지도부는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고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간첩’이나 ‘불순분자’의 개입은 항쟁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이었기에 의심스러운 인물을 색출하려 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전옥주 님의 사례는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또 다른 비극의 하나다.

누구나 다 아는 이유로 다른 지역보다 산업화가 더뎠던 광주와 전남 지역은 당시 매우 강한 지역색을 갖고 있었고 고유의 방언을 사용했다. 토박이 비율이 월등하게 높고 인구 이동이 적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완전히 배제된 가짜 뉴스가 끊이지 않고 확대 재생산됐다.

5·18 유공자 형제를 두었다는 이유로 집 앞에는 한동안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집 근처를 서성이는 낯선 존재들을 찾아내는 건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걸라치면 동네 어르신들이 어린아이 그만 괴롭히고 돌아가라고 호통치곤 했으니, 이방인의 존재는 낯설고 낮선 그런 광주였다.

이것은 간단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일 뿐 사진 한 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간첩이라고 주장하거나 사건을 짜깁기해 사실을 왜곡한 가짜 뉴스에 맞서 제시할 수 있는 광주 항쟁의 진실은 차고 넘친다.

스카이데일리에 4개월 전 입사한 이유다. 외부에서 비판하기보다 내부에서 맞서 바꿔 나가는 게 광주 항쟁의 정신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칼럼을 쓰는 오늘, 스카이데일리가 창간 14주년을 맞았다. 참 더디게 변화하고 있지만 지금 걷는 길이 옳은 방향이길 희망한다.

주경준 산업경제부장 gjju@skyedaily.com 기자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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